공항 사진을 올리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항 사진만 올리고 싶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이렇게 사진 정리하기 귀찮았던 적이 또 있나 싶다. 어느 정도 보정을 해줘야 조금이라도 성에 찬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필름 카메라는 참 편했다. 스캔 받은 파일을 크기만 줄여서 올리면 됐으니까. 올릴 사진을 고르는 데 애를 좀 먹긴 했지만, 대부분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그 고민만 했으면 됐으니까. 마지막 홍콩 여행기의 첫 편에 유난히 공항 사진이 많았는데, 그걸 올리며 매우 신이 났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이유 없이 공항 사진을 만지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한없이 창백한 구조물에 불과한데 어떤 장면이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공항 사진엔 있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무라노 섬의 파로 선착장에서 LN선을 타고 부라노 섬으로 향했다. 앞으로는 부표가, 뒤로는 섬마을이 우리를 전송하는 아스라한 손짓을 보았다. 모터보트의 항해는 30분 남짓 이어졌다. 그동안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몸이 지쳐 감각과 마음을 좀먹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색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머물고 싶어 할 곳, 알고 있는 색깔의 이름이 몇 되지 않는 나 같은 어휘 빈곤자라도 그만큼이나 황홀해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니까. 몇 년 전, 어느 잡지에 실린 부라노 섬의 사진을 보고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며 감탄한 적이 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 매혹적인 나머지 현실감마저 없을 정도였다. 멀고 먼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건..
:: 여행을 돌이키다 보면 기억의 영리한 솜씨에 놀라곤 한다. 주인의 유불리에 따라, 주인의 기호에 따라 구분된 기억은 망각의 릴 위에서 빙빙 돌며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지, 얼마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예컨대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금방 잊히는 데 반해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크게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아주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행기 티켓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한다. 똑같은 공식을 우리가 묵었던 내륙, 메스트레 역에서의 하룻밤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섬이든 육지든 유럽의 겨울이 주는 가없는 적막함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아름다웠고 후자는 황량했다. 시내..
:: 본래 이 카테고리의 2010년 유럽 여행기에 있던 글이지만, 네이버포스트에 올리며 글을 좀 수정하고 사진과 편집을 새로 만져보았다. 또 가고 싶다, 베네치아. :: 기체는 작았다. 아담한 기내 분위기와 종종 작은 동체가 요동칠 때 느낄 수 있는 스릴은 마음에 들었으나 이런저런 불편한 점도 많았다. 우리는 기체의 맨 뒷자리(35E, 35F)였는데 하나뿐인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28번 좌석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만약 이륙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저 앞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상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콜라를 먹으려면 1유로인가 2유로를 더 내야 하는 야박한 인심은 사소한 불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최악이었던 것은 기내식이었다. 비행기가 제 고도에 오르자마자 배가 고..
이렇듯 갑작스럽게 돌아갈 시간이 됐다. 정리하다 보니까 셋째 날 낮 이후로는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 어느새 출국을 위한 터미널에 있었고, 멍한 기분으로 게이트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어쩌면 이번이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허전함을 느꼈다. 어디든 만족했던 곳이라면 "언제 또 오겠어?" 따위의 맥빠지는 소리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었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오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다. "한동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전등에 매혹된 여름 벌레처럼, 피할 곳이 절실한 도망자처럼 홍콩에 또 오진 말자고, 여행 횟수가 줄어들 테니 여력이 된다면 그 기회를 다른 도시에 주자고 다짐한다. 여행을 떠나서 꼭 다시 오겠다는 의지를 불태워 본 적은 있어도 꼭 다시 오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
너츠포드 테라스에서 한국 식당이 많은 거리를 지나 좀 더 아래쪽으로, 스타의 거리에 가까운 쪽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점점 강렬해지는 배고픔을 살살 달래며 눈에 띄는 근사한 곳이 나타나기를, 저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그런 곳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물론 메뉴 자체는 일식으로 하자고 이미 결정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패할 확률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일식을 먹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오히려 홍콩에서 보다 만족스러운 일식을 먹으리란 기대에 부풀어 새로운 일식당을 향한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 의미에서 '고궁'이란 한식점도 우리의 주의를 끄는 덴 실패했다. 오히려 내가 담고 싶었던 건 하늘이었다. 정말 가끔씩 밖에 찍지 않게 된 하늘을 말이다. 건물..
전날 란콰이퐁에서 신나게 마시다 들어온 관계로 오늘도 거의 정오가 다 되어 눈을 떴다. 홍콩의 아침을 보지 못하는 건 이젠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일이랄까. 홍콩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다 눈여겨 볼 부분을 하나 추측하자면, 아침 일찍 공원에 가면 태극권을 하는 시민들을 볼 수 있다는 안내가 아닐까 한다. 일단 나도 그랬으니까. 그땐 몰랐다. 아침에 공원에 가는 부지런함이 나에겐 얼마나 요원한 일이었는지. 공중 정원에 가 하늘을 올려다 보니 날이 많이 흐렸다. 사실 지금까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 여정 내내 홍콩에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봤었기 때문이다. 금요일부터 온다는 비가 토요일로, 토요일부터 온다는 비가 일요일로 미뤄져 마침내 먹구름이 꼈다. 수중전(?..
샹젤리제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도중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거리지만, 내가 만약 이 거리라면 나에게서 이물감을 느낄 것 같았다. 이물감은 예상치 못한 존재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거부반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척 피곤한 상태였고, 날씨는 너무 추웠다. 맑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 빛깔만큼 서늘했다. 내가 본 파리의 야경 중 개선문 전망대에서 봤던 야경이 가장 인상 깊었다. 헥헥거리며 나선 계단을 올라 싸늘한 옥상에 섰을 때, 그때부터 나는 파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막 그치고 시내 전체에 뿌연 안개가 꼈던 밤이었다. 에펠탑 이 층 전망대 높이까지 구름이 내려온 그런 시 ..
어쩌면 이번 우리 일정 중 가장 글로 옮기기 힘든 시간이 아닐까 한다. 토요일 밤, 란콰이퐁에서의 축제. 그저 맥주와 칵테일에 취해 춤추고 놀았을 따름인데 거기에 코멘트 붙일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세를 고쳐잡는다. 사라진 징검다리처럼 밤 시간을 뛰어넘을 순 없지 않겠느냐고. 여행 둘째 날 밤의 우리 일정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완차이 어느 골목길에서 아주 싸고 맛있는 초밥집을 발견한 우리는 저녁으로 초밥을 먹었다. 그리고 진 토닉을 한 잔 만들어 마신 후, 곧바로 침사추이의 너츠포드 테라스로 향했다. 저번 여행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올 나잇 롱'이란 바에 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 흥이 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스테이지에서 볼룸댄스를 추고 계셨는데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즐거웠지만..
해는 뜨지 않았지만, 더위도 같이 숨은 건 아니었다. 종종 약한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며 습도는 한계치를 향해 내달렸다. 바다는 불쾌지수를 배출할 거대한 해방구였으나 무지막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진 못했다. 해풍, 해풍만 우리를 조금 위로해 주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제일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소금기에 바랜듯한 건물 외벽의 색을 보고 있으면 그 모든 여름이 갑자기 감당 가능한 장애처럼 느껴졌다. 집과 사무실과 카페와 대중교통에서 지금껏 너무 습관적으로 "더워 죽겠다."라고 투덜거려오지 않았던가. 그건 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피상적인 대화를 메우기 위한 공용 비밀번호였다. 습관적인 인사, 누구나 알고 있어서 유출할 필요조차 없는 패스워드. 우리는 더위에 공감함으로써 우리에게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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