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야간열차를 탈 시간이었다. 유럽 배낭여행 이후로 야간열차는 처음이었다. 몇 번 기차역을 오가며 보았던 기차들은 대체로 컨디션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D가 짐을 맡기고 받은 영수증을 잃어버려 약간의 헤프닝을 거쳐 짐을 찾은 후, 밤에 먹을 햄버거와 콜라, 비누와 수건 등을 샀다. 한 시간 전에도 탑승할 수 있길래 객차에 올라봤는데 이등석 에어컨 쿠셋을 예약한 덕인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오히려 에어컨이 너무 세서 밤에 어지간히 춥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초록색 커튼을 걷어 위 칸에 짐을 올리고 시범 삼아 가만히 누워보았다. 유럽에서 탔던 위 칸보다 훨씬 넓고 아늑했다. 이건 거의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이 간식거리를 들고 하나씩 들어와 침대 위에 올라가더니 커튼을 ..
(정작 아이폰으로 찍은 시암 파라곤 사진은 없다.) iSanook에서도 체크아웃을 한 우리는 기차역으로 가 유료로 짐을 맡겼다. 그리고 다시 카오산 로드로 이동해 아점으로 피자를 먹고, 커피 월드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거기서 다시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치앙마이행 열차는 밤 10시 출발인데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그래서 어디를 또 들를까 고민하다가 시암 역 쪽에 있는 쇼핑센터 단지에 가기로 했다. 돈도 좀 아끼고 체험도 해 볼 겸 버스를 탔다. 에어컨이 없는 버스였는데 정말 지독히 더워서 내려서 걷는 게 더 상쾌할 정도였다. 방콕의 버스에선 차장 같은 사람이 돌아다니며 버스비를 받았다. 차가 끊임없이 흔들려도 균형을 잃지 않는 두 다리가 굳건한 남자였다. 게다가..
술병이 난 게 분명했다. 오늘은 방콕을 떠나는 날이니까, 이 마시고 또 마시고 싶은 도시를 벗어나 치앙마이에 도착하면 술을 좀 줄이자고 다짐했다. 몸에 힘이 없으니 글도 잘 써지지 않는다. 비단 여행에서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뭐라도 계속 쓰려면 몸 관리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평소에도 되도록 술을 안 마시려 하는 거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려고 (헛된) 노력을 하는 것이다. - 신기하게도 담배를 피우면 글이 잘 써지긴 하는데 노후에 있을 병이 걱정된다. - 맑은 정신과 건강한 몸은 책상 앞에 앉아있는 데 꼭 필요한 특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그렇게 열심히 뛰는지 알 것 같고, 그 점을 굉장히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아마 앞으로 이 이야기를 다양한 버전으로 계속할 것도 같지만, 여행..
저녁 무렵의 카오산 로드. 우리는 마카로니 클럽에 가서 버킷으로 술을 마시며 흥을 돋우다가 로띠와 마타바를 먹으러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방향을 잘못 틀어 멀리까지 흘러갔다가 돌아와 결국 유명한 곳에서 태국의 간식을 먹어 보았다. 굉장히 지쳐있었고,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어디에 들어갈지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일단 더 허브라는 펍에서 가볍게 한 잔을 더 한 후, 카오산 로드 한 가운데에서 가장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마주보고 있는 두 술집 중 한곳에 들어갔다. 음악 소리가 얼마나 큰지 테라스 쪽에 앉은 이들 중 흥을 못 이기는 이들은 물론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행인들도 잠깐씩이라도 춤을 추다가 지나갈 정도였다. 사람들은 카메라로 춤을 추거나 새카맣게 앉아있는 취객들을 찍기도 했다. 내심 카오산 ..
방콕에서의 넷째 날에는 숙소를 옮겨야 했다. 전날 익스피디아에서 저렴한 레지던스로 미리 예약해 둔 우리는 빠르게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친절한 호텔 직원은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는지 다른 곳으로 가는지 묻다가 그저 자는 곳만 옮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택시를 잡아주겠다고 했다. iSanook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자 손수 지도를 출력한 다음 태국어로 메모까지 해서 택시 기사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렇게 진심 가득한 서비스를 받아본 게 얼마 만인지. 기분 좋게 우리의 첫 호텔을 떠날 수 있었다. iSanook은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레지던스로 세련되고 깔끔한 두 채의 빌라로 이뤄져 있다. 리셉션에 있는 직원들은 태국인뿐 아니라 다른 국적의 직원도 있어서 다양한 고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
수다 식당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 기쁘다. 터미널 21 건너편 쪽 골목길 안에 자리 잡은 이곳은 태국 음식을 저렴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이름 높다고 한다. 시설은 낡고 그리 위생적으로 보이지도 않지만, 종업원들이 친절했고 영어도 곧잘 했다. 이곳 역시 현지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은 장소이기도 했다. 거의 빈자리가 없었지만, 운 좋게 안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팟타이와 푸 팟 퐁커리, 그리고 태국 위스키인 쌩쏨과 소다수를 주문했다. 물론 고수는 넣지 않았다. 고수만 빼면 나는 태국 음식이 꽤 잘 맞는 편이다. 특히 특유의 길쭉하고 찰기 없는 쌀이 좋다. 진밥보단 된밥을 좋아해서 그럴까. 팟타이는 달지 않고 오히려 시큼한 편이었고, 푸 팟 퐁커리는 입맛에 잘 맞았다. 오히려 D가 태국 음..
15.3.30. Day 3. 셋째 날에도 느즈막이 일어났다. 정오에 맞춰 놓은 알람에 정신이 들었다. 밤새 에어컨이 꺼지면 땀이 날 정도로 덥고, 에어컨이 움직이면 오싹오싹해져 여러 번 깼던 모양이다. 담배를 꽤 피운 탓에 목도 칼칼했다. 담배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이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있으면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도 없다... 흡연만 하지 않아도 얼마나 건강한 몸으로 여행할 수 있을는지. 가지고 있는 것만 다 피우면 여행 중에 금연해 보는 건 어떨까 한다. 두 시쯤 호텔을 나와 유명한 쇼핑센터인 터미널 21로 향했다. 공항 터미널을 테마로 한 이곳은 각 층에 세계 각국의 도시 이름을 붙이고 그 도시에 맞게 실내를 꾸민 - 심지어 화장실까지 - 놀라운 콘셉트를 보여줬다. 동남아시..
어스름 즈음에 바를 나와 우리는 카오산 로드 주변을 걸어 다녔다. 우리에게도 목적은 있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그러니까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보며 꼭 먹어야 할 것을 먹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던 것이다. 맥주를 마셔서 그리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천천히 저녁거리를 생각할 때였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온갖 식당과 펍과 카페와 숙소가 즐비했고, 왜 사람들이 카오산 로드에서 몇 주, 몇 달씩 체류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거리 전체가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다. 골목 골목은 여러 구획으로 나뉜 창고의 저마다 다른 열쇠였다. D의 능력을 다른 글에서는 여러 번 밝혔긴 했으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그는 현재 위치에서 우리에게 꼭 맞는 장소를 ..
카오산 로드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밀림 속의 거리, 밀림에 온 도시인들의 축제, 그리고 선명, 선명, 또 선명한 원색의 향연. 그 이상의 표현은 나에게 오랫동안 숙제가 될 것 같고, 그래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으면 다시 오면 그만일 것이다. 우리가 걷는 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카오산 로드의 옆길, 그보다 훨씬 모든 것이 밀집한 거리였다. 수십 년 넘게 자란 듯한 나무가 가지로 건물을 쓰다듬고, 덩굴은 건물에 달라 붙어 공생하며, 음악은 스피커로 스며들고 사람들은 고향에선 노출하기 힘든 부위까지 드러내며 열기를 흡수한다. 펍이나 카페 의자에 앉아 길을 바라보며 앉은 사람들은 지나가는 다른 여행자를 구경하거나 책을 읽거나 멍한 시선으로 사색(또는 무념)에 잠겨있다. 비가 그치고 요란한 등장음과..
차툭착 시장이 주말에만 열리다기에 첫 행선지로 잡았다. 고가 철도로 달려 방콕을 순식간에 미래 도시로 탈바꿈시키곤 하는 BTS를 타고 마지막 역까지 가자 어마어마한 인파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 옷이나 가방이든 비닐 봉지를 들고 있고, 거진 치진 표정이었다. 많이 덥진 않았지만, 햇살과 그 햇살을 반사하는 얼굴 때문에 나도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골치가 아플 정도로 많은 물감을 짜놓은 것 같은 녹음과 남대문 시장이나 홍콩의 스탠리 마켓을 연상케 하는 재래 시장의 부조화가 기가 막혔다. 인도를 따라 노상 식당이 진을 쳤길래 아무 자리에나 앉아 점심을 먹었다. 고수가 들어간 것만 빼면 갈릭 포크 라이스는 아주 먹을 만했다. 고수를 갈아넣지는 않은 덕분에 심혈을 기울여 한 잎 한 잎 씩 걸러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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